- 블루베리의 도시 콥스하버 -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는 특산물이 있다. 피식대학 관련해서 얼마전까지 씨끄러웠던 영양은 고추가 유명하고 제주도는 감귤, 의성은 마늘, 성주 참외, 나주 배, 보성 녹차 등등이다. 내가 워킹홀리데이 1년중 대부분을 보냈던 콥스하버는 블루베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내가 일했던 블루베리 팩킹 공장장의 말로는 호주 내 블루베리 70%정도가 콥스하버에서 생산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 덕분에 이곳은 각국의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 줄여서 '워홀러'들에게 아주 친숙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한번쯤은 꼭 들어보거나 살아보게되는 곳이 되었다. 왜냐하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연장을 하려면 농축산업 분야 및 특정 지역에서 일정기간 일을 해야한다. 그렇기에 블루베리 농장이 지천에 널린 콥스하버는 워홀러들의 비자연장용 일을 구하기 위한 유력한 선택지였다. 많은 이들이 이미 거쳐갔기 때문에 정보도 꽤 많고 이미 자리잡고 있는 한인컨트랙터들도 많다. 컨트랙터는 농장과 농장에서 일하고자 하는 워홀러들을 연결해주는 중개자인데, 일을 중개하는 것 뿐만 아니라 타지에서 온 워홀러들을 본인 쉐어하우스에 숙식을 시켜주고 농장까지 픽업해주는 경우도 많다. 이게 언뜻보면 좋은 것 같지만, 양날의 검이다. 왜 양날의 검인지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 블루베리 농장에서의 경험 -
난 처음 콥스하버의 울굴가라는 마을에 와서 첫 한달간은 적응도 할겸 그냥 쉬었고 두번째 달부터 인디안 팜의 대만 컨트랙터 밑에서 블루베리 따는 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 한인 컨트랙터의 악명이 자자했기에 친했던 그 지역 한인식당 사모님이 물들지말라면서 아시는 대만 컨트랙터를 추천해주셨다. 같이 일하는 워커들도 다 대만에서 온 친구들이었는데 대만애들이 확실히 비교적 순하고 착하긴 했었다. 유일한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더 챙겨주는 느낌도 있었고. 그런데 중요한건 돈이 생각보다 너무 안벌렸다. 그 당시가 작물들이 많이 열리는 하이시즌은 아니었던 것 같긴한데. 그래도 한번씩 엄청 많은 곳에 가서 엄청 많이 따도 하루에 100불벌기도 힘들었다. 수익을 계산해보니 방값내고 생활유지하는 정도 밖에 안됐다.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돈을 생각하고 온건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보다 못버는 정도는 좀 심하지 않은가? 그것도 호주인데!
그래도 나는 생활유지라도 했고, 컨트랙터가 나에게 나쁘게 한것은 전혀 없었으니 나은편이었다. 한인컨트랙터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후기가 안좋은 경우가 많다.
사례1
1. 타지의 워홀러들에게 '일이 많다. 와라. 하지만 만약 일이 없으면 방세를 안내도 된다'면서 쉐어하우스를 제공해주는 본인의 크루로 들어오라고 꼬신다.
2. 워홀러들이 막상 와보면 열매가 많이 없어서 돈을 제대로 못번다. 하지만 컨트랙터는 하루에 두시간이라도 일을 시켜서 방세를 받을 명분을 만든다.(보통 농장에서는 따는만큼 버는데 열매가 많이 없으니 하루에 30~40불도 못버는 날이 많다)
3. 그래도 일을 했으니 컨트랙터는 방세를 꼬박꼬박 요구한다.
4. 워홀러들은 돈도 못벌고 현상유지만하거나 심지어 그것도 못하고 가지고온 돈을 까먹기만한다.
5. 세컨을 따기위해 속으로 욕을 하며 버티거나 집 보증금 포기하고 도망간다. (그러면 이 보증금은 당연 컨트랙터가 꿀꺽)
사례2
1.남에게 싫은소리 못하고 만만해보이는 크루원에게 컨트랙터가 접근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보통 소액이다. 200~300불)
2.컨트랙터는 이미 갚을 생각이 없다. 언제 갚는다는 얘기도 안하고 시간이 흐른다.
3.돈을 빌려준 크루원이 얘기를 꺼내보지만 컨트랙터는 차일피일 미룬다. 크루원은 컨트랙터가 주는 페이슬립(일종의 임금영수증)이 비자연장에 필요하기에 강하게 얘기도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4.시간이 꽤 지나고 돈을 빌려준 크루원이 정해진 기간을 채워서 콥스하버를 떠날때가 되었지만 돈을 주지 않는다.
5. 크루원은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콥스하버를 떠난다. (소액이고 해외기때문에 신고절차가 번거로워 신고하지 않는경우가 대부분)
이외에도 페이슬립을 제대로 안주거나 돈을 중간에 띄어먹거나,, 대부분의 컨트랙터가 남자이기때문에 좀 예쁜 여자 워홀러가 들어오면 여자친구를 매번 갈아타는 등.. 사생활 적인 측면에서도 양아치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한테는 농장 한인 컨트랙터라는 직업이 한국의 폰팔이, 렉카, 중고차 딜러같은 안좋은 선입견이 박혀버렸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겠다. 코로나기간동안 워홀러들 다 빠져나가고 물갈이가 좀 됐으려나? 부디 되었기를 바란다.
- 블루베리 팩킹 공장. '오즈베리' -
그렇게 두달정도 대만 컨트랙터 밑에서 일을했다. 그러다 친한 한국인 동생이 블루베리 팩킹공장에 이력서를 세달전쯤 냈었고 이번에 면접? 같은걸 보러오라고 연락이 왔는데 같이 가보겠냐고 했다. 나는 바로 알겠다고 함과 동시에 컴퓨터를 켜서 팩킹공장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공장에 가보니 미리 몇달전에 이력서를 내고 이번에 연락을 받고 온 사람들이 30명?정도 있었다. 공장 슈퍼바이저가 한명씩 이름을 호명하는데 당연히 내 이름은 안불렸고, 나는 그 자리에서 슈퍼바이저에게 가서 나 사실 연락 안받았는데 온거고, 그래도 바로 내일부터 일할 수 있고 일도 아주 잘한다면서 적극적으로 구직의사를 전달했다. 슈퍼바이저가 약간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일단 알았다고 다른 사람들이랑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난 운이좋게 아월리잡(시급받으며 일하는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콥스하버의 대부분 워홀러들이 블루베리 농장에서 일을하는데 극소수의 경우빼고는 전부 능력제로 일을한다. 키로당 2.5불~3불 이런식으로해서 따는만큼 돈을 버는것이다. 보통 우리 크루에서 진짜 많이따는애들은 40키로씩 땄고, 보통 20키로에서 30키로정도 땄는데, 20~30키로 따서는 아월리로 일하는 것보다 수입이 훨씬 적었다. 아침일찍나가서 10시간씩 일하고 들어오는데 20~30키로따서는 당시 한국시급보다도 낮았다. 그래서 아월리잡을 너무 하고싶었는데 운좋게 구한 것이다.
'오즈베리'. 워홀러들은 이 블루베리 팩킹회사를 그렇게 불렀다. 회사이름이 'OZ Group'인가 그랬었는데 그냥 편하게 오즈베리라고 불렀다. 공장에 들어가면 엄청나게 큰 냉장방(?)이 있는데 거기에 블루베리 팩킹 머신이 6개가 있었다. 머신 앞부분에 블루베리를 쏟아넣으면 이물질이나 너무 작은 베리는 버리고 적당한 크기의 베리는 자동으로 플라스틱통안에 포장되어 레일을 따라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걸 포장해서 박스에 넣고 그 박스를 파란색 팔렛위에 똑바로 쌓으면 누군가와서 그 팔렛을 가지고 다른 냉장창고에다 가져다 놓는다. 이게 전체적인 공장의 프로세스였다.
사람이 제일 많이 필요한 파트는 포장되어 나오는 블루베리를 박스에 넣고 그 박스를 다시 팔렛에 쌓는, 머신의 뒤쪽 파트였다. 이 공장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서보냈다. 레일을 따라 나오는 포장된 블루베리가 꽤나 빠르게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당히 애를 먹었다. 제때 블루베리팩을 잡아서 박스에 넣어야 블루베리팩이 뒤에 쌓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8손가락에 죄다 물집이 잡혔었다. 하지만 한두달쯤 일하니 완전 적응해서 나오는 블루베리팩을 안보고도 박스에 넣으면서 앞사람이랑 노가리를 깔수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행복워킹 시작이었다. 캐주얼이라 시급도 괜찮았고. 내가 일하던 머신에는 대만,일본,브라질,영국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다들 너무 착하고 좋았다. 덕분에 아주 재밌게 일할 수 있었고, 일끝나고도 자주 봤었다. 각자 집에가서 술마시고 춤도 추고 챌린지도 하고 노트북 들고와서 fps게임도 같이하고.. 정말 행복했었다.
하지만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다. 블루베리는 1년내내 나는게 아니고, 시즌이 존재했다. 11~12월쯤 되자 블루베리 수확량이 줄어들어 공장 쉬프트가 현격하게 줄어들었고, 많은 이들이 콥스하버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세컨을 땄으니 시드니,멜버른,브리즈번같은 대도시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콥스하버같은 시골, 농장 분위기가 좋아서 타즈매니아로 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완전히 귀국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건 내가 살고있는집(화이트하우스)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화이트하우스 포스팅을 하면서 또 언급하겠지만 모두가 떠나고나니 정말 공허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워홀이라는것이 정착되지 않은, 나그네 삶을 일정기간 사는 것 아니겠는가. 2019년 말, 이 공허한 감정이란것을 처음으로 느끼며 그렇게 나는 워킹홀리데이 1년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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